반듯하게 성경읽기 - 창세기
창세기 1-9장
김 영철 지음
◎ 머리말
장(醬)맛은 먹어 보아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간장이나 된장은 눈으로 색깔이나 모양새만을 보고는 그 맛을 알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이 책도 장(醬)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다. 쓱 훑어보는 것만으로는 이 책의 맛을 알거나 의도하는 것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성경 말씀을 읽고 문제를 풀어 봄으로써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도록 만든 책입니다. 성경을 올바로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삶을 좌우하는 일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으며 그래야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평생토록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안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의 인명이나 지명을 알고 사건들을 외워서 성경 상식을 넓히는 것이 아닙니다. 글로써 표현된 말씀의 내용과 그렇게 말씀하신 의도를 이해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책은 성경 구절을 일일이 설명해 놓은 참고서[註釋]는 아닙니다. 여러분께서 성경을 읽으실 때 말씀의 흐름을 따라서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실 수 있도록 도와 드리려고 만든 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모두의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기를 바랍니다.
2000년 12월 5일
지은이
1주 창세기 1-2장
성경(聖經)은 그저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나 시간 날 때에 읽어서 생활에 도움을 얻어 보라고 유익한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특정 대상에게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말씀하신 내용을 기록해 놓은 글입니다. 바꿔 말해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신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려 주신 글입니다. 그러기에 첫째,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우리가 알고 싶은 사항들을 찾으려 하지 말고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는지를 살펴서 하나님을 잘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을 잘 알려는 목적은, 그분에 대한 정보(情報)를 수집하여 그분을 연구 대상으로 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분을 바르게 섬기기 위함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사실을 소홀히 하면서 성경을 읽거나 공부하려는 것은 그릇된 일이며, 우리의 신앙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창세기는 이른바 모세 오경(五經)이라고 불리는 책의 첫 부분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성경책에서는 창세기가 첫 번째 책입니다. 이는, 편의상 실제로는 한 권의 책인 모세 오경을 다섯 권(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으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모세 오경은 처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책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상황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듯 옛날에 쓰여진 성경이 여전히 오늘날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으로 유효(有效)한 까닭은, (1) 우리가 지금 섬기고 있는 하나님은 바로 그 동일하신 하나님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2) 우리도 과거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이며, 또한 (3) 하나님은 변치 아니하시기에 오래 전 성경에 말씀하신 바대로 세상 끝날까지 역사(歷史)와 자기 백성을 이끌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 [1] 창세기 1장 1-5절 ( 월 일 읽음)
-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4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좇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5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 해와 달 같은 자연물을 신(神)으로 섬기는 애굽에서 오랫동안 종노릇하고 살면서 애굽 사람들의 사고와 풍습에 자연스럽게 젖어들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보다 먼저 알려 주어야 할 사실은, 온 세상을 지으신 분이 과연 누구이신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이 존재하기 시작한 때를 가리켜 태초(太初)라 합니다. 시간을 만드셔서 역사를 출발시키시고, 사람과 동물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인 땅과 하늘을 지으신 분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하게 말해 주는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 하나님께서 온 우주(宇宙)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다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2절부터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중심으로, 날짜별로 차례차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하나님께서 다 만들어 놓으신 세상 속에 살고 있으므로 그들의 관점에서 하나씩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첫째 날에는 빛을 만드셨습니다. 빛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황이 어떠하였는지를 알려 주는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은 ‘무질서하고 허무(虛無)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직은 땅에,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물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새로 지은 집에 이사해 들어가기 바로 전의 상황을 말할 때,“이 집은 아직 사람이 들어와 살지 않아서 가구(家具)도 전혀 없고 텅 비어 있다”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빛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온통 암흑 그 자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땅에 존재하게 될 만물(萬物)은 물(水) 속에서 저절로 생겨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활동하심으로 창조될 것임을 시사하는 표현이 있는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 [2] 창세기 1장 6-13절 ( 월 일 읽음)
- 6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이에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 하나님이 가라사대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물을 땅이라 칭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1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을 내라 하시매 그대로 되어 12 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하셔서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제껏 어둡기만 하던 땅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공존(共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땅은 물로 덮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로 가득 찬 땅을 위와 아래 두 부분으로 나누시기 위하여 물 가운데 궁창(穹蒼)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자신께서 지으신 궁창을 ‘하늘’이라 이름 붙이셨습니다. 이제 땅 안에는 하늘을 경계로 윗물과 아랫물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명하신 대로 다 이루어졌음을 말한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발붙이고 살 공간, 즉 현재 우리가 말하는 ‘땅’을 만드십니다. 하늘 아래에 있던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십니다. 따라서 물은 낮은 곳으로 흘러내렸고 그 결과 상대적으로 높은 곳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드러난 부분을 ‘땅’이라 이름 붙이시고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살아야 할 사람과 동물을 위하여 풀과 나무를 비롯한 각종 식물(植物)을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이것들도 역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완벽하게 창조되었음을 시사해 주는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 [3] 창세기 1장 14-23절 ( 월 일 읽음)
- 14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이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로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15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에 궁창에 두어 땅에 비취게 하시며 18 주야를 주관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19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20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21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과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3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다섯째 날이니라
- 첫 사흘 동안 하나님께서는 이른바 ‘틀’을 만드셨고 이제 그 다음 사흘 동안은 이미 창조된 틀을 활용할 대상 또는 이 틀에 채울 내용물을 만드시게 됩니다. 넷째 날에 만드신 광명(光明)이란 ‘빛’이 아니라 ‘빛을 지닌 물체’(light-bearer)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첫날에 빛을 창조하셨고, 이번에는 이미 창조된 빛을 발산(發散)할 수 있는 물체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해와 달을 만드셔서 하늘의 궁창에 두심으로써, 이제까지 공존 상태에 있던 빛과 어두움이 규칙적으로 번갈아 나타나게 되었고 따라서 낮과 밤이라는 시간적 구분이 생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광명체를 하늘의 궁창에 두신 또 하나의 목적은 기상(氣象) 상태나 재해(災害)와 같은 비상한 사건을 예측해 볼 수 있는 징조와 절기(節氣) 또는 계절 그리고 날[日]과 해[年]를 형성하기 위함임을 말해 주는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 다섯째 날에는 하나님께서 둘째 날 만드신 틀인 ‘물과 하늘’에 내용물을 채우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물에는 수많은 물고기와 수중(水中) 생물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하늘에는 온갖 새들이 날게 되었습니다. 물과 하늘에 존재하는 생물 중에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물과 하늘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음을 강조한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생물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이 복의 내용은 ‘생육하라’,‘번성하라’, ‘충만하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생육하다’는 ‘많은 열매를 맺다’ 또는 ‘다산(多産)하다’는 뜻이며, ‘번성하다’는 ‘많아지다’는 뜻이며, ‘충만하다’는 ‘가득 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셋은 표현만 다를 뿐 실상은 ‘많다’는 공통적인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가지 표현을 사용하여 하나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은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의 내용은, 한마디로 말하면, 지으신 모든 생물의 활발한 종족(種族) 번식입니다. 이와 같은 종족 번식의 왕성함은 단순히 자연적인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는 사실을 말한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새들도 역시 하나님의 복 주심으로 인하여 그 종족의 수를 많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들이 날아다니는 공간은 궁창이긴 하지만, 알을 낳고 새끼들을 키우는 것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땅에 번성하라”는 말씀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 [4] 창세기 1장 24-31절 ( 월 일 읽음)
- 24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25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의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에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30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31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 이 문단은 하나님의 창조 여섯째 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 창조를 다루고 있는 이 문단이 다른 문단들보다 긴 까닭은 이 문단을 더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대상으로 창세기를 쓰고 있는 기록자로서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또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등을 다른 요소들보다 돋보이게 하는 것이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기록자는 이제껏 다섯 날 동안 있었던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다루면서도 여러 피조물들을 단순히 창조된 물품으로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터인 땅과 그 환경이라는 시각에서 그것들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 앞에서 말씀드린 바대로, 처음 삼 일과 나중 삼 일의 사역은 긴밀한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셋째 날 지음 받은 틀은 ‘땅과 식물’이었으므로 여섯째 날에는 그 내용물인 ‘동물과 사람’이 창조됩니다. 이제까지 닷새 동안 하나님께서는 동물과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환경을 완전하게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후에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동물과 사람을 창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동물을 지으시는데 기록자는 이렇게 지음 받는 동물을 크게 셋으로 분류함으로써, 적어도 이스라엘 백성의 관점에서 보면, 땅에 사는 모든 생물을 족히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동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음을 말해 주는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 하나님께서 사람을 모든 피조물 중에 마지막으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땅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라는 점에서는 사람이 다른 동물들과 같겠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신의 형상’을 지녔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신의 형상’ 또는 ‘신의 모양’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김영철, 「주님의 주님되심: 구약(1)」 (여수룬, 1992), pp. 73-77, 87-90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으셔서 어떤 일을 하도록 계획하셨는지를 알려 주는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에 합당하게 대우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동등하게 사람으로 지으셨습니다. 이처럼 ‘남과 여’라는 성(性)이 구별되기에 남녀에게 독특한 역할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남녀 간에 역할의 차이가 아닌 인간적인 차별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인간의 역사에서는 여성에 대한 인간적 차별이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고 심지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조차 이런 차별이 적지 않게 눈에 띄고 있습니다. 이런 불행은 모두 인간의 죄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억누름에서 풀려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창조의 원래 목적에 맞게, 사람을 존중할 능력을 회복하였기에 마땅히 그렇게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존재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만물을 다스리게 되었음을 알려 주는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 [5] 창세기 2장 1-7절 ( 월 일 읽음)
- 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2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4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도 없었음으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에 적셨더라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행하신 창조 사역이, 의도하신 바대로 완벽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이는 세계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창조하셨으며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도 지으셨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그분의 지음을 받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 사실을 가리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또다시 이 사실을, 지음 받은 피조물의 관점에서 표현한 말씀이 나와 있는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즉 우리의 죄악을 대신하여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를 의롭게 만드신 우리의 구주로 믿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이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서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믿지 않는 신자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은,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닌 ‘날’에게 복을 주셨다는 독특한 사실과 복을 주신 이유를 생각할 때, 장차 이 날을 지키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누릴 것이라는 사상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일곱째 날의 또 다른 특성은 하나님께서 이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택해서 자신에게만 속하게 하심을 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을 자기에게 속한 날로 정하셨음을 밝히고 있는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창세기 1:1-2:3의 말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김영철, 「주님의 주님되심: 구약(1)」 (여수룬, 1992), pp. 15-98에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창세기 1:1-2:3까지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신 일을 시간적 순서로 즉 ‘날’별로 서술하였습니다. 이러한 서술로써 기록자는 처음 독자들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바로의 군대를 홍해에 수장(水葬)시키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과연 그러실 만큼 위대하시고 권능이 크신 신이심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기록자는 인간의 최초의 삶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이 땅에서 처음 경험하게 되는 삶이므로 기록자는 자연히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연관시켜 서술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흠집 내려는 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창세기 1장과 2장이 두 개의 창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자는 창조에 관한 내용을 창세기 1:1-2:3에서 말한 데 이어서 이 새로운 문단(창 2:4-25)에서는 창조계의 왕으로 임명된 인간을 중심으로 에덴의 삶을 묘사하려는 것입니다.에덴의 삶을 처음 독자들에게 알려야 하는 까닭은,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해 들이실 약속의 땅에서 누릴 삶의 전형(典型)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본다면, 에덴의 삶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누리도록 의도하신 삶이므로 인간의 타락 이후에 되돌아가야 할 목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 기록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사실을 언급하기 전에 간단하게 환경적인 형편을 서술합니다. 사람 창조를 말한 구절은 세 문장으로 이루어졌는데 앞의 두 문장은 사람을 지으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그러한 행동의 결과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창세기 1:26-27에 묘사된 사람 창조의 내용을 보완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 먼저 상반절은 하나님의 행동을 묘사하는 문장 두 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구절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직역해 보겠습니다.
-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으셨다
그 사람을
그 땅으로부터 [취한] 티끌[로]
그리고 그분께서 불어 넣으셨다
그의 코 안에
생명의 호흡을
- 그리스도인 가운데 많은 분들이 사람 창조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마치 찰흙으로 어떤 모형을 만들듯이 사람을 빚으셨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아마도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라는 표현을 오해한 데서 생긴 듯합니다. 그러나 위의 직역에서 알 수 있듯이, ‘흙으로’라는 말은 정확히 말하자면, “그 땅으로부터 [취한] 티끌[로]”라는 문구입니다. 이 문구에서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재료가 이른바 찰흙과 같은 흙덩어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분은 땅에서 ‘티끌’을 취하셨습니다. 여기서 ‘티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아파르)는 우리말에서는 ‘먼지’로도 번역되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이 용어에는 ‘먼지’라는 단어에서 느끼는 ‘더러움’의 개념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 근본적인 개념은 ‘아주 작음’입니다. 따라서 ‘티끌’로 번역된 이 용어는 ‘세미한 알갱이’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차 독자의 시대에는 이른바 과학적 용어인 ‘분자’(分子)나 ‘원자’(原子)와 같은 미립자(微粒子)에 대한 개념이 없었습니다. 어떤 물질의 원자나 분자를 발견한 것은 현대에 이르러서 이지만, 그렇다고 그 시대에 원자나 분자가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물질의 존재를 가능케 하는 원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의 문구는 우리 시대에 맞게 표현한다면 ‘땅에서 취한 어떤 원소들로써’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그릇되지 않았음은 죽은 사람이 매장되고 나면 흙 속에서 분해된다는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일반적으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라는 문구 역시 잘못 이해되고 있습니다. ‘생기’라는 단어를 ‘싱싱하고 힘찬 기운’(生氣)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신비한 영적 기운을 불어 넣으신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위의 직역에서 보는 것처럼, ‘생명의 호흡’이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진 합성어입니다. 이 합성어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호흡’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생명이 있는 존재라야 호흡을 하기 때문에 이 호흡을 ‘생명의 호흡’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그 코에 불어 넣었다’는 표현도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분들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잘 빚어서 사람 모습을 가진 그래서 동상(銅像)과 같은 그 진흙 조형물을 눞혀 놓은 다음 하나님께서 조심스럽게 허리를 굽히셔서 그 조형물의 코에 마치 인공호흡을 시키듯이 후후하며 숨을 불어 넣으셨다. 그러나 이와같은 회화적 이해는 7절 상반절을 기계적으로 이해하신 데서 생겨난 것입니다.
- 글이나 말은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갖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우리말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국수 언제 먹습니까?”라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분에게 질문했을 때, 이 질문의 의미는 “언제 결혼하느냐?”라는 것이지, 하루 중 어떤 끼니를 국수로 하겠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라는 표현 역시 그러합니다. 성경의 용례를 살펴 보면 구약시대에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죽음에 대해 두 가지의 회화적 묘사를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는 ‘피를 쏟는다’(피를 흘린다)입니다. 이 표현은 타살의 경우에 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호흡이 멈춘다’는 것입니다. 호흡은 주로 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코에 호흡이 없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코에 호흡이 있다는 식의 표현은 살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생기 즉 생명의 호흡을 하나님께서 그의 코에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동작을 직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다 즉 코로 숨쉬게 하셨다는 사실을 회화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7절 하반절 문장을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 인간 창조에 대해 갖고 있는 오해 그것도 너무 그럴듯한 해석에서 빚어진 오해는 7절 하반절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는 문장에서 ‘생령’이라는 단어를 왕왕 ‘성령’과 연관시키거나 ‘영적’인 의미로 파악하려는 것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영적인 존재임이 분명하고 특히 그리스도인은 성령님께서 내주(內住)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원하는 성경의 단어에다가 그런 뜻을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표현을 말하거나 쓴 분이 어떤 뜻으로 한 것인지를 찾는 것이지 자기 좋은 대로 생각해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에 쓰인 원어(네페쉬 하야)는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쓰인 말입니다. 거기서는 ‘생물’(창 1:20, 21, 24)과 ‘생명’(창 1:30)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번역한 것은 ‘네페쉬 하야’의 기본적인 뜻이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곳 창세기 2:7에서 ‘생물’이나 ‘생명’이라는 용어를 사람에게 쓰기에는 우리말의 어법상 어색합니다. 그래서 ‘네페쉬 하야’라는 말을 ‘생물’이나 ‘생명’으로 번역하지 않고 ‘생령’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따라서 7절 하반절은 ‘그러자 그 사람이 산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 따라서 7절을 정리하여 보자면 그 뜻은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어떤 원소들을 취하셔서 그것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호흡을 하도록 생명을 부여하셨습니다. 따라서 지음받은 그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원소들로써 사람을 만드셨는지 그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고 있으므로 우리가 그 점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1) 하나님께서 흙으로 공작품을 만드시듯 흙으로 사람을 빚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인간의 피와 살과 뼈를 정교하게 만드신 것이라고 봄이 더 옳을 듯합니다. 마치 사람이 숨이 끊어진 후 매장되어 분해되기 까지는 그대로 육체의 모양을 갖추고 있는데 바로 그런 모양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셔서 생명을 주시기 직전의 상태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2)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어떤 방법으로 생명을 주셨는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이 점에 관해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이 구절은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살아 움직이게 하신 분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그 여호와,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그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7절은 분명히 선포함으로써 본문(2:4-25)의 첫 문단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체를 만드시고 그 안에 생명을 주셔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되게 하셨음을 말하는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 [6] 창세기 2장 8-17절(1) ( 월 일 읽음)
-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으며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 이 문단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베푸신 크신 배려를 또 한 가지 말해줍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지으시고 그곳에서 사람이 온갖 복을 누리며 살도록 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방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창설하셨습니다. 여기서 ‘창설하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만들다’ 정도의 뜻이 아니라 ‘심다’라는 것입니다. 마치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나무를 심듯이,‘에덴’이라는 지역에 동산을 심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편의상 그 동산이 위치한 지역의 이름을 따서 ‘에덴 동산’이라고 할 뿐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에덴’은 동산의 이름이 아니라 지역의 이름이지만, 이제는 ‘에덴 동산’이 그 동산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이 동산의 규모는 전혀 알 수가 없지만 처음 사람들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누리도록 하신 모든 행복을 만끽하기에는 층분히 넓은 장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수가 더 많이 늘어날 경우(불행히도 그러질 못했지만)에 그 동산은 비좁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 동산이 비좁아서 살 수 없게될 사람들은 어디서 살아야 하는가? ‘에덴 동산’ 밖에서 살아야 하는가? 그렇다면 그곳도 ‘에덴 동산’인가?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주는 것이 ’심었다‘는 동사입니다. 이 동산은 심겨진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이 동산은 점점 더 커지도록 만들어진 곳입니다. 마치 지어진 건축물처럼 그 크기가 고정되어 있는 곳이 아닙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 동산에 거주하는 사람의 수가 불어나도 능히 이곳에서 모두 비좁음을 느끼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 크기가 나무가 자라나듯 커져 가는 그런 동산을 특별히 만들어 놓으신 것이고, 이런 에덴 동산의 특성,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에덴 동산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된 용어가 ‘심었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곳에 살도록 하려는 목적을 갖고 따로 특별히 만들어 놓으신 곳입니다. 이곳은 사람이 살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로 지어진 삶터인 것입니다. 이처럼 에덴 동산은 하나님께서 심으신 동산입니다. 따라서 이 동산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지으신 그 사람을 데려오셔서 이 동산에서 살도록 하셨음을 말해 주는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 에덴 동산은 사람이 정착하여 조성해나갈, 그런 일종의 개척지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이미 완벽하게 조성된 최적의 삶터입니다. 9절부터 14절까지는 이러한 에덴 동산과 그 주위 환경을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이 묘사에는 모든 것이 샅샅이 담겨있지는 않지만, 적어도 일차 독자들에게 에덴 동산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만한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두 나무, 강(江), 보석입니다. 게다가 에덴 동산에는 모양도 좋고 먹기도 좋은 온갖 나무들이 다 있었습니다. 이것들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9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땅으로부터 보기에 즐겁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나게 하셨다”(직역).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사람의 최저 생계 수준을 위해 필요한 것들만 마련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사람의 최고 수준의 삶을 위한 환경을 갖추어 놓으신 것입니다. ‘보기에 좋은’ 온갖 나무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좋은’이란 ‘기쁨을 주는’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온갖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나무는 단지 관상용(觀賞用)이 아닙니다. 이것은 먹기에 좋은 열매들을 제공해 주는 식용(食用) 나무이기도 합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미적(美的) 환경과 식생활 환경을 완벽하게 갖춰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복된 삶터에서 인간을 살도록 하신 목적이 무엇인지 알려 주는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 [7] 창세기 2장 8-17절(2) ( 월 일 읽음)
- 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10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11 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에 둘렸으며 12 그 땅의 금은 정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에 둘렸으며 14 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편으로 흐르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녀로 창조하시고 그들로 만물을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에덴 동산에 들어와 하나님과 더불어 살게 하시고 그들에게 할 일을 맡기셨습니다. 따라서 이 일은 창세기 1:26, 28에서 계획하시고 말씀하신 일과 다른 성격의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만물을 다스리는 일을 시작하도록 하시면서 ‘다스리는 일’이 어떤 성격의 일인지를 분명하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다스리는 일이 무엇인지를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
- 에덴 동산이라고 해서 죽음이 도무지 끼어들어 올 수 없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가능성은, 언제든지 사람의 불순종에 의해서, 현실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동안은,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살도록 하려는 의도를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원한 삶을 누리기 위해 순종해야 할 일은 조금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쉽고 간단한 일이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은 어떤 열매든지 먹을 수 있고, 무엇이나 할 수 있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놀라운 자유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모든 것을 위임받아 자신의 판단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진정한 자유인이었습니다. 이 엄청난 자유에 비해 단 한 가지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되는, 아주 작은 제한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 제한 때문에 사람의 삶에 조금이라도 불편이 생기거나 행여 보이지 않게 인권이 짓밟히는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제한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며, 하나님께서 인간과 더불어 영원히 살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일은 이처럼 간단한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요구하는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신의 말씀을 순종하는지 아니 하는지를 알기 위한 시험으로서 이른바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진정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복을 누리며 하나님 자신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나무를 동산 중앙에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한 자신의 의도를 시사하신 구절은 어디입니까?( 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