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과 하나님의 언약

죤 징컨드 지음 • 김영철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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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옮긴이의 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구약은 옛 언약, 신약은 새 언약을 의미하므로 성경은, 바꿔 말해서 언약(言約)의 책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과 언약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성경은 ‘언약의 책’이라고 할 때, 이 말은 성경이 언약에 관한 모든 자료들을 항목별로 배열해 놓은 사전(辭典)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언약의 움직임에 그 초점을 두고 있는 책이라는 뜻입니다.
창조 때부터 세상 끝날까지 역사(歷史)를 이끌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피조물을 다시 새롭게 하실 목적을 가지시고, 바꿔 말하자면 온 세상의 구원을 위해 역사를 주도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역사를 ‘구원역사’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구원역사는 단순히 하나님의 일하심[事役]들을 이어 놓음으로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원역사라는 수레가 움직이려면 바퀴가 필요한데 그것이 곧 언약인 것입니다. 바퀴가 움직인 만큼 수레가 나아갈 수 있듯이, 언약의 움직임이 구원역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적(靜的)인 ‘개념’의 시각이 아니라 동적(動的)인 ‘움직임’의 시각으로 언약을 이해하려 한다면, 언약의 어원 ․ 어휘적 정의(定議)를 파악하려고 지나친 소모전(消耗戰)을 하기 보다는, 그 언약을 세우시고 발전시키시고 새롭게 하시며 또한 신실히 지키시는 하나님 그분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됨으로써 오히려 언약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언약의 움직임이 활발할수록 하나님의 계시의 양이 풍성해지고 그분의 구원활동이 왕성해집니다. 이러한 언약의 움직임을 담아 놓은 그릇이 신 ․ 구약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으며, 또한 언약 이해의 폭에 따라 성경 이해의 증감(增減)도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책「성경과 하나님의 언약」은, 성경의 언약들을 온 힘을 다해 연구한 학자들의 가르침을 잘 간추려서 일반 독자들이 소화할 수 있도록 제시해 놓은, 한 마디로, 매우 유익한 입문서입니다. 한번 읽어보시면 이 책의 참 가치를 맛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는 눈이 더욱 크게 열리고, 이로 인해 우리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한층 새롭고 고맙게 여겨져서 평생토록 그분을 우리 언약의 주님이시며 우리 왕으로 받들어 섬기며 순종하려는 삶이 이전보다 튼튼해지기를 소원합니다.
1990년 8월 21일
옮긴이
지은이 머리말
언약에 관한 책이 과연 필요한가? 언약은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서 사소한 주제가 아닌가? 게다가 언약은, 복음주의자들은 대체로 받아들이지 않는, 분파주의에 가까운 어떤 특정한 신학적 입장을 나타내는데 자주 사용되는 용어가 아닌가? 이와 같이 언약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평신도들이 꽤 있다는 이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본인은 언약 개념이야말로 깊이 다루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이제까지는 언약에 관한 책들이 주로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어 왔다. 이를테면, 구조로서의 언약 개념, 성경의 언약과 힛타이트(Hittites)나 앗수르(Assyrians)의 군신(君臣) 조약과의 관계, 또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언약 용어에 대한 연구등이다.
물론 이와 같은 전문 연구서적들이 중요하지만, 그런 것들은 대부분의 평신도들에게는 거의 소개되지 않는다. 그 이유 중 하나로서, 그런 내용들은 신학교 도서관에나 있는 신학 전문 잡지들 속에서라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학 연구와 기독교 출판 사업이 겪는 안타까운 일들 중 하나는, 신학자들이 다루는 대부분의 내용들이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즉시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는 선풍을 일으킬 만한 그러나 실상은 읽을 가치가 있는지 의문스러운 책들만을 출판하려고 애쓰는 출판업자들이 있으며 또한 그런 책들만 읽으려는 독자층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언약 개념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므로, 우리는 이 주제에 전념할 필요가 있다. 본인은 이 책으로 인하여 독자들이 성경으로 되돌아가되, 단순히 기록된 내용을 살펴 보는 정도의 일(물론 이 일도 필요하지만)뿐만 아니라 역사와 율법 심지어 족보들까지도 관통하고 있는, 언약의 활기찬 흐름을 파악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책의 연구 방법
우리는 먼저, 신명기에 나타나 있는 언약 갱신 또는 언약 재인준과, 이 언약의 처음 수립 과정에 대해 살펴 보려고 한다. 언약의 모델이 가장 분명히 나타나 있는 곳은 신명기이므로 이 신명기의 언약모델을 사용하여 언약의 윤곽이 좀 덜 뚜렷한 구절들을 조사해 보면서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른 언약들을 연구해 나갈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연구 과정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결과들이 신약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를 알아볼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언약에 관한 모든 구절들과, 신약성경에 나오는 제도들 중 언약과 연관된 것은 모두 다 연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게 해 볼 수도 있겠지만 ․ ․ ․ ․ ․ ․ .따라서 우리의 연구 방법은, 구약의 언약을 연구할 때 흔히 사용하는 주제별 접근 방법(한 언약씩 개별적으로 살펴보는 방법) 을 취해서, 구약의 여러 언약들을 연구하고 또한 그것들이 신약과 갖는 연관성을 알아보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는 연대기적인 순서나 성경책의 차례를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분부터 시작해서 잘 모르는 부분으로 옮겨가는 것이 교육상 적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라기는 우리가 이런 식으로 연구해 가는 것이 매우 바람직하고 포괄적인 것임이 입증되었으면 한다. 이 책에서는 신학적인 전문용어를 최대한 줄였으며 가급적 쉽고 간결한 표현을 사용하였다.
언약 개념은, 옳게든 그르게든 간에, 개역파 교회들과 장로 교회들에 의해서 사용되어져 왔기 때문에,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 역자주: 한국에서는 흔히 ‘계약신학’이라고들 한다)을 그러한 교회들의 주요 특징인 ‘유아세례’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 중에도 유아세례를 성경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뿐만 아니라, 본인이 몇 년 간 관찰해 본 결과, 장로 교회와 개혁 교회의 많은 신자들이 언약에 관한 수많은 신학적 가르침을 듣거나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언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복음주의자들과 개혁 교회들은 이 근본적인 성경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본인은 성경이 언약에 관하여 가르치는 것을 밝혀 보려고 한다. 아무쪼록 본인은 이 책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앙을 튼튼하게 하며 그분의 언약에-믿음으로 또 사랑의 순종으로-반응하는 일에 도움이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본인은 어떤 한 책이 나오기까지 이런저런 일로 많은 사람들이 수고를 하는데 유독 어느 한 사람 즉 저자에게만 영예를 돌리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이 출판되어 나오기까지 수고한 모든 분들을 여기서 밝히고 싶다. 우선 초고를 타이핑할 뿐만 아니라 원고를 몇 번씩 읽으며 많은 유익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나의 아내 Mary에게 감사한다. 또한 원고의 어법과 수사법상의 결함을 교정해 주신 Dordt College 영어학과의 Jack Vandenberg 교수께 감사드린다. 표지 디자인을 맡아 수고한 동료교수인 Norman Matheis 교수에게 감사한다. Dordt 출판사의 편집장이신 Marvin De Young께서 초고에서부터 이 책이 완성되어 나오기까지 수고를 아끼지 않았음을 감사드린다. 한편 Simon Kistemaker와 Meredith G. Kline 그리고 Gordon Spykman 세 분 신학자께서 도움 말씀을 주시고 추가사항들을 알려주심을 감사드린다. Dordt College가 1980-1981까지 휴가를 제공해 준 덕택으로, 본인이 이 책을 저술하는 일과 그 외 다른 일도 할 수 있었다. 끝으로 본인의 원고를 출판하도록 크게 격려해 주신 Dordt 출판사 앞에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혹시라도 도움을 주신 분으로서 여기에 누락된 분이 계시면 용서를 바라며, 모든 분들께 거듭 감사를 드린다.
죤 징컨드
(John M. Zinkand)
Sioux Center, Iowa
소개의 글
성경의 근본적 개념인 언약에 관한 책들은 많지 않다. 그래서 독자로서는 언약에 관한 책이나 논문이 간간이 나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형편이다. 그러므로 이 책이 출판됨으로 언약신학에 관한 지식이 증가되는 것이니 실로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 책은 성경에 근거한 이 언약 개념의 본질, 의미, 계시, 그리고 연관 사항들을 잘 훑어보는 일에 꼭 필요한 책이다. 언약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성경에서 자주 반복하여 확언하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 속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과 연합하시며 교제하시길 원하신다. 그분은 백성들이 자신을 그들의 언약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기를 바라신다. 그러므로 언약의 본질은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는 말로 요약되는 것이다. 언약에 대한 표현들은 다양하다. 그럴지라도 그것들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진리를 나타낸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고, 그들에게 참 신앙으로 그분을 신뢰하길 요구하시며 그들이 그분의 말씀에 일치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순종하며 살기를 기대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취하셨기 때문에, 언약은 그분에게서 시작된다. 그리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언약 파트너(covenant partner)이다. 이런 점에서 언약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이 언약의 양축이 되기 때문이다. 언약이란 말은 신약에서보다는 구약에 훨씬 더 자주 나오지만, 언약에서 파생된 문제들은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나타난다. 그리고 언약과 연관된 중요한 용어들도 신구약 모두에 나온다. 즉, 구약성경의 언약 개념이 신약 성경의 메시지가 된다. 이처럼 언약은 신구약 성경의 통일성을 입증해 주는 개념이다. 열일곱 개의 짤막짤막한 장(章)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가 의도한 것은, 언약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알려 주려함이 아니고 다만 언약에 대해 알아듣기 쉽도록 간결하게 훑는 식의 설명을 하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대단히 훌륭한 것이다. 아무쪼록 저자의 이 탁월한 개론서가, 장차 언약에 관한 성경적인 가르침을 더 상세히 써보려는 마음을 갖고 있는 분들에게 자극제가 되길 바란다.
사이몬 키스터메이커
(Simon J. Kistemaker)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Jackson, MS
1984년 여름
제 1 장 - 은유적 표현으로서 언약
언약은 일종의 은유(隱喩)적 또는 회화적 표현이다. 그런데도 언약은 종종, 마치 좋은 결과를 낳게 하는 마술적인 비법(秘法)처럼 저절로 작동하는 법칙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간주된다면, 합리적인 설명을 시도해 볼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사실 언약은 세례와 연관을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은혜가 임하도록 하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처럼 회화적 또는 은유적 표현인 언약(그리고 세례도 마찬가지로)은 그 모습이 가리워져 있다.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나 인간 상호간의 관계, 또한 심지어 삼위 하나님의 각 위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많은 실례를 사용한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아버지라고 불리운다. 여기서 아버지란 말은 삼위 중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관계를 묘사해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대해야 할지도 아울러 나타내 준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바로 이 호칭을 쓴다.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묘사할 때 히브리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취한 예들이 사용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로 묘사되며 또한 바위, 요새, 강한 산성, 방패, 그리고 자기 백성을 위하여 싸우시는 전사로도 묘사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들의 지도자요 재판장이시기도 하다. 또한 이스라엘을 자기의 ‘장자’라고 부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분은 자기 백성들을 향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은유적 표현은 이따금씩 가족관계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스라엘이 곁길로 갈 때엔,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적용된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간음한 여자로 묘사된다. 또한 아버지와 장자의 관계가 거의 끊임없이 그 배경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켜 ‘이스라엘의 자손(아들들)’ 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러한 표현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것이 은유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수 세대에 걸친-혈육의 자녀들과 손자들인 것이다. 하나님과 겨루어 씨름한 자(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겸손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뜻에서 또는 하나님과 겨루기를 계속하지 않는다는 다소 역설적인 뜻으로, 그런 명칭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었다. 그들은 잘못 생각하여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하나님과 산 믿음의 관계가 있다는 것과 동일시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영적인 관계의 참모습을 나타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은유적 또는 회화적 표현을 왜곡시켰다. 따라서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그 표현은 그들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지를 배울 수 없었다. 비유는 어떤 교훈을 확연히 드러내거나 어떤 요점을 뚜렷이 제시하기 위한 단순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소재는 일상생활에서 나온 것들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비유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시기 위하여 자주 비유를 사용하셨다. 이러한 비유들은, 믿는 자들에게는 깨달음을 한층 더해 주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그냥 불신앙을 고집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 성경에서 비유는 신구약에 모두 나온다. 그러나 비유들 외에 다른 종류의 예화들도 나온다. 그리고 성경의 비유들과 예화들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질 때도 있다. 따라서 무리하게 의미를 파악해 내려다가는 왜곡을 불러 일으킬 뿐이고 그것이 지닌 은유적 표현은 더 이상 쓸모 없게 될 수도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 중 상당수가 그 이야기가 말하는 사건 뒷면에 어떤 은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때때로는 그 이야기의 어디까지가 실제적인 의미이고 어디까지가 은유적인 의미인지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이에 대한 구약성경의 한 예는 다윗왕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윗은 모두 사십 년 간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는 백성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가기도 했고, 국가의 경제를 부흥시키기도 했다. 또한 그는 외국에 대사를 파송했고 외국에서 오는 대사를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그의 통치 말년에는 대규모의 건축 사업을 준비했고, 솔로몬을 자기의 계승자로 확정하였다. 우리는 이 모든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서 다윗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기록자가 쓴 이 모든 내용대로 과연 그렇게 행한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이 다윗왕의 역사적 실제성을 믿으면서도 우리는 또한 다윗에게는 겉으로 드러난 이것들 이상의 어떤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스라엘 왕으로서의 다윗과 ‘이스라엘의 왕직’이라는 제도를 떼어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떼어서 생각해야 하는 까닭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이 깊은 의미를 갖는 상징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왕이라는 것은, 심지어 왕이나 여왕이 절대적인 군주가 아닌 오늘날의 경우에서도, 여전히 상징적인 것이다. 그것은, 왕과 여왕은 나름대로의 역사와 전통과 관습을 지닌 자기 나라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그 나라의 국민과 경제적 정치적 힘, 그 나라의 대망과 운명까지도 나타내기 때문에 상징적이다. 이 모든 것이 다윗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다윗이 왕이었던 이스라엘은, 전통을 따라서 또는 관광객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서 여전히 왕실을 유지하고 있는 오늘날의 왕실 국가들과 비교되서는 안된다. 이스라엘은 이 세상에서 유일한 하나님의 백성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은 곧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이다. 즉 왕 다윗은 단지 상징적 수령으로서 예루살렘의 왕위에 앉아 있었고, 실제의 왕은 주님 여호와이셨던 것이다.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은유적 표현으로서 왕은 중요한 요소인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 그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주님은 하늘에 계신 왕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세상의 모든 왕들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성경은 다윗의 계열이 끊임 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면 그 참 뜻이 왜곡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꿰맞춰서 문자적인 이해에 맞게 짜 넣으려면 많은 문제점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 되어 갈 때 유다의 왕은 눈이 먼 채 그 백성들과 함께 사로잡혀 갔다. 이것은 정복당한 백성의 비참한 모습이다. 또한 왕궁과 그 안에 있는 아름다운 물품들도 약탈 당했던 것이다. 포로로 잡혀간 후 약 70년이 지나서 귀환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으나 이제 과거처럼 찬란하지는 않은 이 예루살렘에서 왕좌를 다시 빛나게 할 왕은 없는 것이다. 이처럼 다윗의 왕위를 이을 후계자가 없는데도 성경에는 ‘왕’이라는 표현이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신약성경 시대가 시작되자 선포된 첫 마디는 그 왕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다. 한편 헤롯은 이 왕을 몹시 두려워 한 나머지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모든 사내 아기를 죽이도록 명하였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 왕이라 부르는 것을 용인하셨다. 또한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팻말 위에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기록하였다. 이같이 은유적 표현으로서 ‘왕’개념은 구약에서부터 온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왕되심을 인정하며 주께서 가르치신 모범적 기도인 주기도문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기도한다. 구약성경의 왕 개념에는 실제와 상징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바로 이러한 개념이 우리가 지닌 신학적 이해의 바탕이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다윗과 왕의 개념을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론과 제사장 개념에 대하여 계속 생각해 보겠다. 여기에도 역시 문자적인 면과 상징적인 면이 섞여 있다. 레위 지파 출신 아론은 최초의 대제사장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다. 그리고 그 직임의 계승은 아론의 아들들에게로만 제한되었다. 대제사장도, 왕의 경우처럼, 그의 임무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상징하고 있는 것 때문에도중요했다. 그러나 대제사장직과 그의 임무에서 상징적인 면을 구분하는 것은 왕에게서 그런 면을 구분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대제사장의 임무는 종교적인 면에서 그 백성의 최고 대표자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즉, 그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던 자가 바로 대제사장이었다. 그는 먼저 자기 죄를 위해서 제사를 드린 후, 일년에 한 차례씩 성막(후에는 성전)안에 있는 지성소로 들어가 거기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했다. 그러나 히브리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제사들은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대속사역 때문에 유효한 것이다. 황소나 염소, 또는 암소를 제물로 드리는 제사로는 도저히 죄가 사함 받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제물로 규정하셨기 때문에, 그런 제사를 드려야 했다. 그 제물들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살과 기름과 뼈와 근육 등이었다. 이런 제물들을 제단에 드리기 위해서는 짐승들이 실제로 살해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약시대의 제사에는 문자적인 면과 상징적인 면이 서로 섞여 있었다. 만일 어떤 이가 살과 기름을 드리는 이 제사를 그 실제의 영적 제사와 동일시한다면, 상징적 의미가 왜곡된다. 왜냐하면 짐승을 드리는 제사는 단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제사의 상징적 의미가 중요한 것이다. 이는 그 제사가 나타내 주는 ‘그리스도의 희생제사’가 없다면 짐승의 고기 덩어리 자체는 아무런 가치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약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한 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즉, 왕직이나 제사장직이나 제사처럼, 언약도 실제이면서 동시에 어떤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인 것이다. 그렇지만 언약은 매우 폭넓은 추상적 개념이다. 바꿔 말하자면 언약은 왕관을 쓴 왕도 아니었고, 대제사장의 예복을 입은 것도 아니다. 언약은 권위가 부여된 법적인 관계인 것이다. 이 언약에는 제사의식이 수반되며 복과 저주의 엄중한 선언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언약 그 자체는 아니다. 다만 이런 것들은 이미 수립된 쌍방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쓰일 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성경의 언약 개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어떠한 관계를 갖고 계신지 묘사해 주는 하나의 표현 방식이다. 따라서 우리가 앞에서 말한 여러 다른 개념들처럼, 언약도 상징적인 것이다. 즉, 그것은 하나의 은유적 표현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점 때문에 역사적 실제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아니 떨어져서는 안된다). 언약은, 실제로 구약성경 시대에 근동지역의 통치자들이 만든 조약들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조약들을 제 2장에서 우리가 살펴보려고 한다.
제 2 장 - 언약과 조약
지난 150년 동안의 고고학적 발견은, 우리가 성경시대의 생활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이와 같은 발견들은 팔레스타인은 물론 이집트, 그리이스, 터키, 시리아, 그레데 등에서 있었다. 온 도시가 샅샅이 발굴되었다. 따라서 고대 신전들과 피라밋, 장터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그 장대함은 덜 하지만 상당히 중요한 발견물, 이를테면 헬라어로 쓰여진 파피루스 조각들과 점토로 된 토판 위에 여러 언어로 쓰여진 법전들, 그밖에 수 천 가지의 문서들이 있었다. 이러한 발견물들은 성경시대의 사람들과 그들의 관습에 대하여 새로운 빛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언약 역시 이러한 조명을 받아 알려진 관습인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언약이라는 말은 약 280회나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성경 저자들이 자신들의 독자가 이미 잘 알고 있던 개념을 사용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다. 바꿔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언약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시대의 다른 나라들도 역시 그랬던 것이다. 언약은 조약을 뜻하는 평범한 용어이다. 사실 학자들은 오래 전에 이미 성경을 통해서 언약은 단순히 어떤 계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이 용어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처럼 판매 계약이나 임대 계약이라는 일종의 협정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20세기의 개념을 성경에 적용시켜서 성경을 그런 개념으로 해석하는 일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언약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사용해야 할 모델은, 그 연대가 주전 1500년경부터 주전 700년 사이의 것인 힛타이트(Hittite) 문서들 가운데 나타난 조약들이다. 이 조약들은, 자기가 다스리는 거대한 영토 안의 어떤 특정 지역이나 소도시 국가를 다스리도록 통치자를 세워 놓고 그들 모두를 자기의 통제 하에 둔 대군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들은 ‘군신(君臣) 조약’(suzerain-vassal treaty)이라고 불려진다. 이 ‘군신조약’들은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군주에게는 속국 왕들과 조약을 맺을 때 지켜야 할 의무조항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편 성경학자들은 이미 성경의 언약 관계가 일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위와 같은 성경 밖의 모델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 즉 언약이나 조약은 쌍방간의 계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조약이나 언약은 쌍방적이 아니라 일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조약이 군주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주도 되었다고 해서, 신하에 해당하는 속국 왕들에게도 아무런 의무가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뿐만 아니라 신하인 속국 왕이 그 조약 조건을 협상하거나 좀 더 나은 조건을 요구할 수도 없다. 다만 그는 그 조약을 받아들이고 그 조건대로 행할 것을 동의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쌍방간에 협상할 수 있는 계약이나 협정은 현재 우리의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조약은 자기 수하에 속국 왕들을 거느리고 있는 군주에 의해서 수립된다. 군주는 자기 제국을 좀 더 안정되게 하기 위해서 자기의 속국 왕들과 이와 같은 조약을 맺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약을 일단 맺게 되면 군주는 혹시 어떤 반역이라도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덜게 된다. 왜냐하면 신하인 속국 왕들은 의무적으로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군주 즉 수립자에게 역점을 두고 작성된 이러한 조약서들은 ‘나-너’(I-YOU)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힛타이트 조약서들은 다음과 같이 6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 1. 전문(前文): 군주를 소개함.
  • 2. 역사적 서문: 군주의 위대한 업적을 약술함.
  • 3. 조약 규정들: 완전한 충성을 요구하고 외국과의 동맹을 일체 금지함.
  • 4. 신들을 부름: 이로써 쌍방이(속국 왕 뿐만 아니라 군주도) 신들께 기원하고 그 조약의 증인으로 삼음.
  • 5. 복과 저주의 선포: 이 조약을 지킬 경우에 받을 복과 그것을 어길 경우에 받을 저주를 언급함.
  • 6. 조약의 영구화를 위한 조치: 이 조약 문서를 보관하는 일과 속국 왕의 계승자와 조약을 갱신하는 일 등을 포함하여 조약을 영구케 하려는 조치들을 언급함.
클라인(Meredith G. Kline) 교수는 이러한 힛타이트 조약의 윤곽에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의 여러 요소들이 잘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예를 들면, 십계명의 서문인데, 이 서문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과 이 언약을 맺으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말해 준다. 그분은 홀로 한 분뿐이신 대 주재 여호와이시라고 말한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매주 십계명을 들을 뿐 아니라 그 내용을 익숙히 알고 있기에 사실상 십계명에 대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여호와께서는 여기서 출애굽 사건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 위대한 사건은 구약성경 전반에 걸쳐 언급되고 있다.(삿 2:12; 미 6:4; 시 78:12; 81:10; 삼상 8:8; 삼하 7:6; 대상 17:21; 렘 2:6; 호 12:13). 뿐만 아니라 스데반의 설교에서도 이 출애굽 사건이 언급되었고(행 7:36), 히브리서도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히 8:9) 조약 규정들에 관해서 말하자면 십계명의 명령들이 바로 그것에 해당한다. 십계명은 군신조약의 특성을 띤 형식으로 시작된다. 즉, 어떤 다른 이와의 동맹을 금지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물론 성경의 언약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수정이 불가피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군주에 해당하는 분은 여호와이시며, 이스라엘에게 다른 동맹을 금지시킨 것은 다른 신들과 관계를 갖는 것을 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십계명의 어떤 특정한 형식이나 법규들만으로 언약을 한정지어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법규들은 더 늘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크게 늘어나 있다.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이 짧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로 요약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요약된 율법도 역시 속국 왕들은 군주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해야 한다는 조약의 내용을 그 모델로 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언약은 참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기 때문에, 언약의 증인으로서 다른 신들을 부르는 일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곧 자기 자신의 증인이신 것이다. 더욱이 언약의 조항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 한 분 외에 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금하고 있다. 이처럼 모델이 되는 이 조약형식은 우리가 성경의 언약 형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지만, 반드시 인식해야 할 점은 형식이 그 내용을 결정지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계시는 그것을 받는 백성의 언어로 표현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말씀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그 틀이 지닌 제한성에 얽매일 리 없으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언약도 복과 저주의 선포로 인쳐진다. 복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사람들이 누리게 될 혜택이다. 그런데 복과 저주의 선포에서 괄목할만한 점은 저주가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다. 즉 신명기 27장과 28장 거의 전체가 저주의 말씀으로 꽉 차 있다. 반면에 복에 관해서는 짧게, 신명기 28:1-14에 나올 뿐인데 그나마 3-6절에만 복이 제시되어 있고 그 나머지인 1, 2절과 7-14절은 제시된 복에 대한 해설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멘으로 선서한 것도 저주에 대해서이다(신 27:15-26). 이로써 아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언약을 어길 경우 저주를 받게 될 것임을 인친 것이다. 신명기 27장 안에 아멘이 12번 나온다는 사실에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언약의식에서는 이스라엘의 지파들을 두 그룹으로 나눈다. 그리고 여섯 지파는 그리심산에 서고 다른 여섯 지파는 에발산에 서서, 한 그룹은 복에 대해서 응답하고 다른 그룹은 저주에 대해서 응답한다. 그러나 복과 저주는 백성 전체에게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것이다. 그리고 저주가 선포될 때마다 백성이 아멘으로 응답하였는데 이런 저주가 12개라는 사실은 우리로 12지파를 연상케 한다. 또한 이처럼 12차례나 아멘이 반복된 것은, 이 언약의 엄숙성을 강조한다. 아멘으로 응답된 마지막 저주인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그것을 받들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27:26)는 내용은 포괄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은 율법 전체를 지킴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사랑과 순종함을 보여야 한다’는 율법의 요약을 반영해 주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용하는 아멘이란 말은, ‘그대로 이루어지길 바란다’ 또는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들은 아멘으로 응답함으로써 만약 그 언약의 규정을 어겼을 경우에 자기들에게 닥쳐올 운명을 확정한 것이다. 이러한 저주에 대한 그들의 응답을 다음과 같이 풀어볼 수 있겠다. “우리가 이 언약을 어기면 이 끔찍한 저주(멸망)가 우리에게 임하길 바라나이다.”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서약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십계명의 머리말에서, 이 언약에 대한 공식적인 소개뿐만 아니라, 언약의 본질 즉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까지도 알게 된다. 이러한 사실이 언약의 본질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율법의 요약적 표현이 확증하고 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 5)